Seung Beom Hur
우리는 어떤 동물이 동물원을 탈출했는지 알지 못한다.
고동연(미술사/미술비평)
《동물원 탈출기》는 22개월 된 딸과의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함께 동요를 부르고 동물 이름을 가르치며 보낸 평범한 나날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동심의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딸이 고기 굽는 집게를 보고 ‘악어!’라고 외쳤다. 날카로운 톱니는 악어의 이빨 같았고, 긴 손잡이는 몸통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우리도 한때 모두 아이였고 자유롭게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문명인이 되기 위해 언어와 사회적 규범 속에서 동심은 쓸모없고 유치한 것으로 무의식 깊숙이 억압된다. (허승범, 작가 스테이트먼트 《동물원 탈출기》, 2025.)
허승범 작가가 얘기하고 있는 《동물원 탈출기》에서 주재료는 장난감이다. 작가의 설명을 빌자면, 아버지가 된 시점에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서 새롭게 장난감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새롭게 보기’의 시작인 셈이다. 원래 쓸모없는 물건의 새로운 효용성을 발견하는 것은 예술가가 오랫동안 해온 일이다. 미술사에서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19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이 일상의 억압된 사회적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재봉틀, 테이블, 우산과 같이 매우 일상적인 물건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다. (재봉틀과 우산이 병치된 것과 같이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물체 사이의 조합은 1869년에 발표된 이시도르 두카세(필명 로트레아몽)의 64번 시 “말라르메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에서 처음 등장했고, 1920년대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의 세계를 흠모하는 프랑스의 문인이나 예술가들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사진작가인 맨 레이의 <로트레아몽에게 경외를(Hommage à Lautréamont)>(1920)에는 재봉틀과 우산이 나란히 놓여 있다.)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기능성의 측면에서 규정해온 재봉틀이나 우산의 용도, 즉 옷을 꿰매고, 비를 받치고 등의 전통적인 역할을 부정했다. 그리고 유용한 물건들이 효용성을 잃어버리고 예술가의 눈에 의해서 새롭게 발굴되고 예술 작품의 부분으로 수용될 때 진정한 예술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때 예술가는 물건을 그 자체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함께 병치한다. 전통적인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기는 한데, 예술가가‘감각적이고 지적인 놀이’를 통해서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내게 되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제목과 연결해서 새로운 쓰임을 상상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다. 예술가의 실험은 비로소 감상자가 이 유희의 과정에 참여하게 될 때 완성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진의 역할이다. 허승범은 장난감들을 조합해서 배열한 후에 사진을 찍는다. 특정한 배열과 구성을 통하여 자신의 관점을 첨가해간다. 여기서 리얼리티는 ‘연출된(staged)’ 것이기는 하지만, 사진의 앵글이나 빛과 그림자의 배열에 따라 감상자의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감상자는 제목을 통해서 특정한 메시지를 읽어낼 만한 단서를 얻기도 한다. 장난감이 놓인 특정한 방식뿐 아니라 이것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특정한 시점과 제목에 힘입어 감상자는 비로소 전체 상황을 파악하게 되고 ‘빈틈’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게 된다. 답안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조합을 통하여 작가와 감상자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은 예술 감상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사진가는 이러한 효과가 현상적인 리얼리티를 조작하지 않고도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보이는 방식뿐 아니라 보는 방식이 상상력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작은’ 동물의 반란
우선 동물은 현대 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유럽의 1차 세계대전(1914-17) 중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말이나 소를 자주 그렸다. 스페인 내란 당시 유명한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소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동물은 전쟁 중에 잔인하게 도륙된 민간인이나 희생자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인간, 혹은 인간 세계와는 달리 자신의 이익만을 내세우지 않는 순수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문명과는 대비를 이루는 존재이자 인간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영험한 존재인 셈이다. 허승범 작가가 딸을 통해서 동심의 순수한 세계를 재발견하게 될 때 ‘동물’ 소재를 사용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심의 세계에서 인간과 동물은 서로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한발 나아가서 19세기 인간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제어한 장소이자 기관이다. (동물원의 탄생사에 대한 고전적인 비평서로는 니겔 로스페드(Nigel Rothfels)의 『야만인과 야수: 근대 동물원의 기원(Savages and Beasts: The Birth of the Modern Zoo)』(2007)이 있다. 책은 동물원이 초기부터 서구사회의 초기 자본주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설복하고 있다.) 자연을 자신의 호기심이나 즐거움의 목적으로 가둬두면서 생겨난 부정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동물원 탈출기’는 동물원에서 동물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가의 프로젝트이자 조금 살을 부쳐서 설명하자면 어른이 되면서 작가가 내면적으로 제어해온 일종의 동물에 비견될만한 순수함을 ‘해방’ 혹은 ‘탈출’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더더군다나《동물원 탈출기》에 등장하는 동물 대부분은 작고 덜 위협적이다. <악어새로 살아가기>에서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주인공은 악어가 아니라 악어새이다. 작고 보잘것없고 위협적이지도 않지만 어떤 면에서 악어와 같이 무섭고 큰 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동물이 악어새이다. 작가는 악어의 모양을 만들고 내부에 치실을 놓는다. 여기서 감상자가 예의주시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악어의 입 모양이 아니라 ‘악어새’이다.
마찬가지로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라는 격언으로부터 따온 제목의 사진에서 개구리가 주인공이다. 악어새가 악어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존재이듯이 개구리는 자연의 생태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지만, 생태계의 유기적인 상태를 위해서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개구리는 사진의 중앙에 있지는 않다. 돌을 던졌을 때 물 표면 위에 만들어지는 파장을 따라가다 보면 원경에 있는 개구리를 발견하게 된다.
작은 동물을 다룰수록 반전의 미학이 더 빛을 발한다. 동물의 물리적인 크기, 화면상의 구도가 보잘것없을수록 숨겨진 역할이 더 놀랍게 느껴지게 된다. 작고 폐품에 가까운 물건들로 만들어진 ‘동물’의 이야기가 감상자의 눈길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악어새의 내부에 있는 작은 이쑤시개와 같이 허승범 사진의 주인공은 원래 크기도 작지만 전체 화면에서 변방에 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에서 개구리는 작은 돌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작은 동물이야말로 인간이 우리의 현재 삶에 대하여, 혹은 문명에 대하여 다양한 문제점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악어새나 개구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도드라지기는 하지만 압도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큰 형태는 어떻게 작은 형태와 연관되는가? 어떻게 보잘것없는 존재들은 외부 환경이나 타 생물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서 생존하는가?
허승범은 아주 작은 장난감, 거의 버려질 법한 물건을 조합하고 이것들이 수평적 구도 안에서 연결해서 보여준다. 달팽이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달팽이 라디오>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이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에서도 감상자의 눈은 중심부에서 천천히 물 표면의 파장을 거쳐 원경의 개구리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집트 벽화나 19세기 프랑스 역사화와 같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려진 회화는 수평적인 구성을 지닌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감상자가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감상자가 점차로 왼쪽에서 오른쪽, 근경에서 원경으로 점을 잇듯이 이미지 간의 연관성을 유추해가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도록 이끈다. 시간적 추이에 따라 주어진 정보를 정리하고 연결해서 이야기를 파악하는 과정은 흡사 소설을 읽거나 연극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을 시간적 추이에 따라 파악하는 방식에 견줄만하다.
허승범의 사진 중에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있다. <기린과 춤을>에서 나무 막대를 이어서 만든 기린 형태가 놓인 탁자 위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가 형태를 만들어낸다. 감상자로서는 기린 형태의 오브제보다도 동물의 등 뒤에 존재하는 창문 너머의 세상에 관심을 두게 된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게 될 때 당연히 감상자는 보이지 않는 창문 밖의 세상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된다. <기린과 춤을>에서 밝은 톤의 제목과는 상반되게 시선은 기린 그 자체가 아니라 기린을 둘러싼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와 그림자의 끝에 존재하는 유리창 밖의 세계에 더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다. 과연 창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주인공인 기린보다 배경이 더 궁금해질 때 상상력을 더욱 발동하게 된다.
외할머니댁: 유년기로의 여행
감상자의 눈이 화면을 더듬어갈 때 필연적으로‘시간’이라는 요인이 부각된다. 그런데 허승범의 사진에서 이 시간은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딸의 동심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에 그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남겨져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오래되어 보이는 집안 실내가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기억을 가리킨다.
물론 사진은 과거의 기억, 엄밀히 말해서 희미해진 과거의 기억에 관한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이 필연적으로 죽음이나 소멸과 연관된다고 주장했다. 우선 사진이 찍혀진 순간 이미 사진 속 리얼리티는 과거의 것이 된다. 사진은 과거를 박제화해왔다. 덧붙여서 허승범의 사진에서의 기억은 동심이라는 요인과 맞물려 있다. 이번 사진 시리즈에 등장하는 많은 물건도 기억과 연관된 것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의 과거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작가가 택한 것은 과거의 장소와 물건을 재방문하는 일이다.
때문에 <거미의 시간>은 시간에 관한 사진의 철학적인 명제와 작가 개인의 기억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 원래 작가가 첫 미팅에서 제시한 이 작품의 제목은 ‘시간을 붙잡은 거미’였다. 사진이 과거의 시간을 붙잡아 놓는 물리적인 수단이라면, 시계 위에 놓인 거미는 시간을 잡으려는 듯이 시계를 안고 있다. <거미의 시간>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과거의 시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가 개인의 관점에서 돌아가고 싶은 동심의 세계를 의미한다. 아울러 빛바랜 색상 효과, 누리끼리한 벽지는 노스탤직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기다리는 강아지>도 마찬가지로 외할머니댁에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강아지는 사진의 하단에 놓인 의자 위에 그냥 놓여 있다. 사진 속에서 중요한 것은 강아지 자체가 아니라 강아지를 둘러싼 과거의 장소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의자 위 벽에 엄마와 이모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물론 사진의 인물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강아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지 않은 사진은 감상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강아지는 가족사진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여기서 강아지는 작가의 기억 속의 강아지일 수도 있고 본인 자신일 수도 있다. 어차피 동심의 세계에서 만난 동물은 본인의 현재를 가능하게 해준 또 다른 알터이고(alter-ego)이기도 하고, 동심의 세계에서 날아온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이 과거의 시간을 절대 붙잡을 수 없듯이 외할머니댁의 냄새, 향기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적어도 작가의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 기억은 사진 기록과 절대 등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생할 수 없는 과거를 찾는 과정은 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영원히 달성할 수 없으므로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우리는 계속 그것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강아지가 하단의 의자에서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내 안의 동심과 동물을 찾아서
일상의 물건을 통해서 억압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친 어른들의 무의식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아울러 이것을 조작된 리얼리티가 아닌 적어도 실제 리얼리티를 찍고 감상자에게 제시해서 상상력을 유발한다는 측면에서 안드레 브레통(Andre Breton)은 사진이 초현실주의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부추겼다. (Andre Breton, "Le Surrealisme et la peinture," La Revolution surr'aliste. vol. 1 (July 1925), 26-30.) 예술가의 의식적인 간섭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일상에서 억압된 기이한 측면을 찾아내려는 자동주의(automatism)적인 관점에서 사진은 유용한 매체일 수 있다. 물론 허승범의 사진이 제시하고 있는 만들어진 리얼리티가 정교하기보다는 어눌하여서 우리의 눈을 완벽하게 속일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감상자가 숨은그림찾기에서처럼 제목과 동물의 형태적인 유사성, 상징적인 의미를 꿰맞춰야 한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적인 태도와 맥을 같이 한다.
허승범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공동체적인 무의식이나 유럽의 종교, 도덕적 관념, 특정 이념을 재고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확히 무엇에 반기를 들고 있는지 불확실해 보이기도 한다. 대신 모든 과정은 점진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의 무의식이나 동심을 재발견하려는 시도와 자신의 어린 시절 물건과 장소를 대상으로 삼아서 일종의 감상자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 모두가 점진적이다. 여기서 허승범이 감상자를 대하는 태도도 일종의 초대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기억의 물건이나 조합한 동물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기록한 후에 감상자를 초대하고 있다.
이때 사용한 동심의 세계를 마냥 순수하게만 접근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흔히 오염되지 않은 상태를 상상하고는 하는데 실제 어린 시절도, 그에 관한 기억도 흐릿하거나 복잡한 경우가 더 많다. 과거를 재생하고자 하면 할수록 허승범의 사진에서처럼 시각이 잘려 보이기도 하고 주객이 전도되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찍은 외할머니댁의 풍경은 감상자에게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는가?
게다가 동심의 세계를 어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순수한 세계를 염원하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흐릿하고 모호하다. 외할머니집의 강아지와 과거 이모와 엄마들의 사진처럼 과거 기억의 단면들은 머릿속에서 각자 연결되지 않은 채 존재하다가 튀어나온다. 이 때문에《동물원 탈출기》에서 동물=동심이 완벽하게 해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동물이 동물원을 탈출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이 ‘동심’의 실상이고 여기서 말하는 ‘동물원 탈출기’의 실상이다.
* 고동연은 전후 한국미술에 나타난 냉전, 소비문화, 젠더 문제를 탐구해온 미술사가, 비평가, 기획자이다.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집행위원(2017–2021), 2017·2018 고양 야외조각축제 커미셔너, 강원국제트리엔날레 2024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최근 저서로는 『The Korean War and Post-memory Generation: The Arts and Films in South Korea』(런던: 러틀리지, 2021), 이정실 교수와 공저한 『전후 맥락에서의 한국미술사(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Art in Context, 1950–Now)』(런던: 블룸즈베리, 2025)가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전후사진사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





